19세기 후반의 격변 속에 류구의 이중성은 가치를 잃었다.
류구국은 일본보다 중국과 가까웠다.이미 류구왕으로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(1422) ‘상(尙)이란 성을 하사받고(1428) 있었다.
이 글에서는 남양(南洋)으로 쓰겠다.이웃의 작지 않은 나라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.17~19세기를 통해 류구는 두 나라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로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.
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외국인을 그린 ‘황청직공도(皇清職貢圖·1769년경)에 등장하는 류구인.임진왜란 후 중국 조정은 일본을 공식적으로는 외면했지만.
일반인은 구메무라 주민을 중국인의 후예로 여겼다.
(남중국 선사유적의 유전자 채취 연구를 통해 남양인이 꽤 깊숙한 내륙까지 자리 잡고 있던 상황이 밝혀지고 있다.남양어의 지금 분포 지역은 거의 모두 섬들이다.
잡아간 왕과 신하들을 2년 후 돌려보내고 구메무라를 오히려 더 키워주었다.제주도보다 작은 섬이 북산·중산·남산으로 쪼개져 있었다니 제주도의 삼성혈(三姓穴)이 떠오른다.
630~665년 기간에는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가는 항로였다.두 문명권 사이 중계무역은 16세기 초 유럽인이 나타날 때까지도 남양인의 손에 남겨져 있었다.